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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의 역사

1.가마쿠라시대이전(12세기까지의 가마쿠라)

 가마쿠라는 일본열도의 동서를 잇는 수륙교통의 요충에 있었던 일로부터 4세기 후반에는 현재의 즈시시(逗子市)와 하야마마치(葉山町)의 경계인 능선상에 기나이(畿内)의 야마토조정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나라가 지정한 사적 《나가에사쿠라야마고분군》)이 구축되였습니다.

 또한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서는 율령제하에서의 지방행정부인 군아(郡衙)가 설치되여 있었다고 추정되고, 가마쿠라시립 오나리소학교 부지에서 1990년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가마쿠라군아의 정청자취(政庁跡)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후 국내에서는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 개발한 영지를 기반으로 한 영주층이 출현되고, 그 지방의 군사력을 통솔하는 동량으로서 헤이씨(平氏)며 겐지(源氏)가 대두했습니다. 그런 중 11세기 이후에 가마쿠라는 겐지의 거점으로 되고, 1063년에는 미나모토노요리요시(源頼義)가 가마쿠라고유이(鎌倉郷由比)에 츠루가오카하치만구 와카미야(鶴岡八幡宮若宮)를 모시고, 12세기중반 후에는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가 현재의 쥬후쿠지(寿福寺)가 소재하는 가메가야츠(亀ケ谷)에 무가관을 지었습니다.

2.가마쿠라시대(1180~1333년)

무가정권의 수립

 헤이지의 난(平治の乱)(1159년) 후 이즈(현재 시즈오카켄)에 유배되여 있던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는1180년에 동국의 무가집단을 모아 가마쿠라에 들어갔습니다. 요리토모는 츠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에 참배가서 겐지의 정당한 후계자인 것을 표명하고 츠루가오카하치만구를 무가 및 정권의 수호신으로서 정권소재지의 중심으로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에가라텐진쟈(荏柄天神社)를 북동의 귀문을 지키는 신으로서 자리매김했습니다.

 요리토모는 무가와의 사이에 주종관계를 확립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권력의 기반으로 하여 조정과는 다른 정권을 수립했습니다.그후 가마쿠라는 무가정권소재지로서의 정비가 개시되고, 1182년에는 츠루가오카하치만구의 참배길 와카미야오지(若宮大路)가 가마쿠라의 중심축으로서 정비되였습니다.

 1185년에 헤이씨를 멸망시킨 요리토모는 1187년에 헤이케(平家)를 추토한 속죄를 하기 위해 츠루가오카하치만구에서 호죠에(방생회)를 처음으로 진행하고 야부사메(流鏑馬)를 봉납했습니다.1189년에는 히라이즈미(平泉)의 오슈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를 멸망시키고, 그 때의 적편 전사자 공양을 위해 1192년에 요후쿠지(永福寺)의 축조를 개시했습니다.1199년에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홋케도(法華堂)에서 공양이 진행되고,1200년에는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부지자취에 가마쿠라 최초의 선종사원(禅宗寺院)으로 되는 쥬후쿠지(寿福寺)가 건립되였습니다.

바쿠후의 성립

 상술한 것처럼 미나모토노요리토모는 순조롭게 세력을 뻗혀 1192년에는 조정으로부터 세이이(征夷)대장군으로 임명되였습니다.이후 세이이대장군(장군)을 정점으로 한 무가정권은 《바쿠후》라고 불리우는 조정으로부터 독립한 정치기구로 되고, 무가정권의 전통적인 지배・통치기구로서 에도시대까지 계속되였습니다.

 미나모토노요리토모가 겐지였기때문에 겐지의 계통에 속하는 무가외에는 세이이대장군으로 될수 없는 관습이 형성되고,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교토에 정권을 둔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 》와 17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현재의 도쿄에 정권을 둔《에도바쿠후(江戸幕府) 》도 각각 창시자인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1305~1358년) 및 도쿠카와이에야스(徳川家康)(1543~1616年)가 겐지의 계통에 속하는 무가로서 세이이대장군으로 되고 《바쿠후》를 열었습니다.

바쿠후권력의 확립

 겐지장군이 3대로 혈통이 끊어진 뒤에는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의 생가인 호죠씨가 바쿠후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호죠씨는 바쿠후제기구의 장관을 겸하여 집권직에 취임하고 이것을 대대로 세습하여 정권을 주도했습니다(집권정치).

 한편 바쿠후창시자인 요리토모의 혈통이 끊어진 것을 계기로 조정의 복권을 목표로 한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1180~1239年)은 1221년에 바쿠후타도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 위기에 오히려 단결을 강화한 바쿠후의 군사력에 의하여 조정측은 진압되였습니다(쇼큐의 난(承久の乱)).그후 바쿠후는 조정에 가세한 귀족이며 사무라이의 영지를 몰수하여 유력 고케닌(御家人)에게 보상으로서 배분한 일로부터 가마쿠라바쿠후의 전국지배는 한층 강화되였습니다.이 실권강화를 배경으로 제3대 집권 호죠야스토키(北条泰時)는 1232년 분쟁해결의 기준이며 합의정치의 규범으로 하기 위해51개조로 된 무가의 독자적인 법률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를 제정하였습니다.

정권소재지의 정비

 가마쿠라바쿠후는 지배와 권력의 더 큰 강화를 목표로 하고, 신도와 함께 선종을 중핵으로 하는 불교를 종교정책의 양륜으로 할 것을 의도했습니다.그 구체적 대책으로서13세기중반으로부터 바쿠후가 주도하여 선종의 본격적인 도입을 개시하고,1253년에 제5대 집권 호죠토키요리(北条時頼)가 선종전문도장인 겐쵸지(建長寺)를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무가정권이 충실해짐에 따라서 정권소재지로서의 기능정비가 도모되고, 와카에노시마의 축항이며 아사히나기리도오시(朝夷奈切通)의 건설을 위수로 한 가메가야츠자카(亀ヶ谷坂), 게하이자카(仮粧坂), 다이부츠기리도오시(大仏切通) 및 나고에기리도오시(名越切通) 등의 육,해로가 정비되였습니다.그리고 바쿠후와 민중의 안녕을 기원하는 진호국가사상에 근거한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1252년에 가마쿠라다이부츠의 주조가 개시되였습니다.

 그리고 겐쵸지경내의 슈다루키(朱垂木)망루군, 가쿠온지(覚園寺)경내의 햐쿠하치(百八)망루군, 나고에기리도오시의 만다라도와 망루군 등 골짜기며 산기슭을 잘라내여 조성된 사원경내와 기리도오시 주변에는 가마쿠라고유의 장송형태를 나타내는 《망루》가 수많이 축조되였습니다.

가마쿠라바쿠후의 쇠퇴와 멸망

 일본은1274년(분에이의 역(文永の役))과 1281년(고안의 역(弘安の役)) 두번에 걸쳐 몽골제국의 내습을 받았습니다(원구(元寇)).이 격퇴에 성공한 제8대 집권 호죠토키무네(北条時宗)는 몽골전에서의 적아군의 전사자 공양을 위하여1282년에 가마쿠라에서 두번째 선종전문도장인 엔카쿠지(円覚寺)를 건립하였습니다.그리고 제9대 집권 호죠사다토키(北条貞時)는1296년에 몽골제국의 재 내습시의 전승을 기원하여 가쿠엔지를 건립하였습니다.

 한편 집권정치는 점차로 호죠씨의 정통혈통(도쿠소(得宗))가와 그것을 유지하는 특정된 분가에 권력이 집중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대 몽골방어에 대한 과중한 전비부담 등에 고생하는 각층의 불만은 바쿠후를 주재하고 있었던 호죠씨에게 집중되였습니다.

 이런 불만이 최고점에 달한 1333년에 가마쿠라는 불만분자를 모아 바쿠후에 반기를 든 닛타(新田)・아시카가씨(足利氏)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기리도오시가 정권소재지의 방어거점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가마쿠라측은 가메가야츠자카(亀ヶ谷坂)・게하이자카(仮粧坂) 등 지에서 공격군을 습퇴시켰지만,남서의 해안부근을 공격받아 패퇴하고,제14대 집권 호죠다카토키(北条高時) 이하의 호죠일가족은 도쇼지(東勝寺)에서 자해해 죽고,가마쿠라바쿠후는 멸망되였습니다.

무가문화의 발상과 성립

 가마쿠라바쿠후가 추진한 종교정책을 반영하여 무가는 신불(神仏)을 독실하게 신앙하였는바, 특히 정권을 담당한 호죠씨는 그 표시로서 본거지로 한 가마쿠라의 각지에 배분된 자신의 관 근처에 사원을 건립했습니다.1251년에는 호죠토키요리(北条時頼)・나가토키(長時)가 죠코묘지(浄光明寺)를,1258년에는 호죠사네토키(北条実時)가 쇼묘지(称名寺)를,1251년에는 호죠시게토키(北条重時)에 의해 고쿠라쿠지(極楽寺)가 각각 창설되였습니다.이러한 사원에서는 활발하게 불교교학의 연구가 진행되고, 쇼묘지에는 1275년에 그 부속기관으로서 가나자와문고(金沢文庫)가 창설되였슴니다.가마쿠라의 사원은 일가족의 공양의 장소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무가의 정신수양이며 학문・문화의 취득의 장소로 되고, 회화・조각・차등의 문화적 제요소도 양성되였습니다.

 또한 13세기중반부터는 일중무역의 활성화에 따라서 선종과 함께 중국문화가 번성하게 흘러들고, 가마쿠라는 국제색채가 농후한 정권도시로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이것은 쇼묘지며 가나자와문고에 대량으로 전세하는 송・원대찬술(宋・元代撰述), 인쇄한 한서(漢籍)・불서(仏書) 등 서적류, 도자기 등 미술공예품류 등 당시의 중국제 문물이 여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의 지식계급이였던 승려,특히 수많은 선승이 무역선에 편승하여 빈번하게 일중사이를 왕래하는 것에 의하여 시문학,서예.회화,인쇄,끽다의 풍습으로부터 일상의 의식주에 이르는 중국문화 전반이 일본으로 이입되였습니다.

 이처럼 가마쿠라바쿠후를 수립한 무가는 정치기구의 정비,권력강화의 과정에 있어서 선종을 중핵으로 한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무가문화를 창출해 갔습니다.

《무가의 옛 도읍・가마쿠라》관계년표 (장군・집권명의 앞의 원수자는 대수를 표시한다)
서력장군집권그외 중요인물사항
1180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에 들어가고,츠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을 현재지에 옮기다.
1180   요리토모가에가라텐진쟈의 신전을 건축하다.
1182  호죠마사코 (미나모토노요리이에・사네토모 모친)요리토모가 아내 호죠마사코(北条政子)의 순산기원을 겸하여 와카미야대로를 만들었다.
1191(①미나토모노요리토모)  가마쿠라시중에 큰 화재가 일어나고,츠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등이 소실되다.
1192①미나토모노요리토모  요리토모가 세이이대장군(征夷大将軍)으로 임명되다.
 |  요리토모가요후쿠지(永福寺) 를 건립하다.
1199(②미나모토노요리이에)  요리토모 사망.오쿠라(大倉)의 지부츠도(持仏堂)(후의 홋케도 (法華堂))에 매장되였다고 한다.
1200| 요사이(일본 임제종개조)호죠마사코가 요사이를 개산에 초청하고 ,쥬후쿠지(寿福寺)를 창건하다.
 ③미나모토노요리토모①호죠토키마사  
1218|②호죠요시토키 호죠요시토키가 오쿠라야쿠시도(가쿠온지의전신)을 건립하다.
1219(④구죠요리츠네)| 미나모토노사네토모 조카인 구교에게 암살되다
1221|| 죠큐의 난(承久の乱)이 일어나다.고토바상황,오키(隠岐)로 유배됨.
1224|③호죠야스토키 야스토키가 죽고,공양당으로서 홋케도가지어지다.
1231④구죠요리츠네| 오아미다부츠가 호죠야스토키의 원조를 받고,와카에노시마를 축항하다.
1232|| 바쿠후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를 제정하다.
 || 이때 야스토키가 도쇼지(東勝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1241|| 야스토키가 무츠라도(六浦道)의 본격적인 정비를 개시하고,아사히나기리도오시(朝夷奈切通)가 개척되다.
 ⑤구죠요리츠구④호죠츠네토키  
1251|⑤호죠토키요리 호죠토키요리・나가토키의 발원으로 죠코묘지(浄光明寺)가 창건되다.
1252⑥무네타카친왕| 가마쿠라다이부츠의 주조가 개시되다.
1253||난케이도류(임제종다이카쿠파종조)호죠토키요리가 난케이도류(蘭渓道隆)를 개산에 영접하고, 겐쵸지(建長寺)를 열다.
 || 이때 토키와에 호죠마사무라의 별저가 영위되다.(호죠씨토키와테이
1258|| 호죠사네토키의 가나자와별저의 아미다도(쇼묘지 전신)에서 관정의식이 진행되다.
1259|⑥호죠나가토키호죠시게토키(바쿠후렌쇼)호죠시게토키가 닌쇼를 개산에 초청하고,고쿠라쿠지를 열다.
 ||닌쇼(사이다이지류율종승려) 
1259||호죠사네토키쇼묘지가 창건되다.
1267|| 신카이가 개산으로 되고 쇼묘지를진언율종으로 고치다.
 ⑦코레야스친왕⑦호죠마사무라  
1274|⑧호죠토키무네 몽고 내습(분에이의 역)
1275|| 사네토키가 가나자와의 별저에 문고를 설치하다.
1281|| 재차 몽고내습(고안의 역)
1282||무가쿠소겐(엔가쿠지개산)호죠토키무네가 무가쿠소겐을 개산에 영접하고,엔가쿠지를 열다.
1285|⑨호죠사다토키 시모츠키소동이 일어나고,아타치씨(安達氏)가 멸망하다.
1293⑧히사아키친왕| 대지진에 의하여,쥬후쿠지켄쵸지 등이 도괴하다.
1296|| 호죠사다토키가 가쿠온지를 창건하다.
 ⑨모리쿠니친왕⑩호죠모로토키  
 |⑪오사라기무네노부  
 |⑫호죠히로토키  
 |⑬호죠모토토키  
1324|⑭호죠다카토키 쇼츄의 변 일어나다.
 |⑮가나자와사다아키  
1327|⑯아카하시모리토키무소소세키(텐류지・린센지개산)무소소세키를 창시자로 하고,즈이센지가 열리다.
1331|| 겐코의 난이 일어나다
1333|| 도쇼지에서 다카토키 이하의 호죠 일가족이 자결.가마쿠라바쿠후 멸망.

※ 표중의 빨강표시의 인물은 구성자산에 포함된 중요한 요소인 진쟈며 사원등에 관련된다는 것을 표시한다.

3, 가마쿠라시대 이후

무로마치시대~에도시대(14세기전엽~19세기후엽)

 가마쿠라바쿠후 멸망후의 가마쿠라에서는 무로마치바쿠후의 가마쿠라쿠보 아시카가씨가 사원과 절을 적극적으로 보호・부흥함과 동시에 선종에 귀의해 가마쿠라에서도 교토와는 다른 5산제도를 확립했습니다.그러나 1455년 이후,아시카가씨가 가마쿠라지배를 포기하는 것 등에 의하여 가마쿠라는 쇠퇴하고,가마쿠라다이부츠가 노좌로 되는 등 가마쿠라의 진쟈와 절은 서서히 황페해져 갔습니다.

 그후 전국 다이묘 고호죠씨(後北条氏)는 츠루가오카하치만구의 수조며 타이헤이지부츠덴(太平寺仏殿)을 옮겨 엔가쿠지샤리덴(円覚寺舎利殿)을 부흥하는 등의 일을 했으나,본격적인 부흥은 에도바쿠후에 의하여 진행되였습니다.츠루가오카하치만구며 겐쵸지 등 주요한 진쟈와 절의 부흥을 진행하였습니다.

 가마쿠라는 에도시대에는 《아즈마카가미(吾妻鏡)》 등의 기사를 통하여, 또한 가부키의 무대로도 된 일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고,에도로부터의 유람지로 되였습니다.19세기 후반에는 개항된 요코하마로부터 구미인이 찾아 오게 되였습니다.

근・현대(19세기후엽~)

 1868년 에도바쿠후를 타도하고 메이지정부가 성립되고,여기에 가마쿠라시대이래의 무가지배・무가사회는 종언을 맞이함과 동시에 일본은 이 이후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였습니다.

 가마쿠라는 메이지정부의 신불분리령에 의한 페불훼석(廃仏毀釈)의 영향으로 진쟈와 절이 경제적 기반을 잃는 등 한때 황페해 졌으나,1889년의 요코스카선개통에 따라서 귀족・군인・정재계인 등의 주택・별장이 지어짐과 동시에 해수욕 등의 보양지・관광지로서도 번영하게 되였습니다.

 1923년에 간토대지진이 발생하고,지진이며 츠나미 등에 의하여 많은 진쟈며 사찰이 도괴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즉시 복구의 조치가 취해졌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이 지진으로부터의 부흥사업중에서 진쟈와 절이 보유한 문화재를 지진이며 화재등으로부터 보호해 가기 위하여 가마쿠라국보관(박물관)이 그 자금의 태반을 시민(가마쿠라동인회)의 기부에 의하여 건설되였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는 가마쿠라는 교토・나라와 함께 전재로부터 보호되고,또한 전후부흥의 과정에서는 가와바타야스나리(川端康成)며,오즈야스지로(小津安二郎) 등에 의한 가마쿠라를 무대로 한 문학작품이며 영화작품이 많이 제작되였습니다.

 그후 가마쿠라는 수도권에 근접한 양호한 주택지로서 개발이 진행되였는바,1964년의 츠루가오카하치만구 뒷산의 대규모개발계획을 계기로 1966년에 옛 도읍 보존법이 제정되고,역사적풍토보존구역의 지정이 진척되는 것에 의하여 그 산릉부는 개발에 의한 파괴로부터 보호되고, 가마쿠라시대이래의 옛 지형이 보존되고 있습니다.